에스트로겐·프로게스틴 복합제, 혈전 발생 위험 최대 8배 상승
자궁내 장치(IUD)·임플란트는 혈전 위험 낮아 상대적으로 안전
특히 정맥 혈전색전증(VTE, Venous Thromboembolism)과의 연관성은 많은 연구에서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는 주요 문제 중 하나다. VTE는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심각한 질환으로, 경구 피임약 복용자에서 위험성이 높아질 수 있다는 지적이 꾸준히 이어져왔다. 이런 가운데, 미국의사협회지(JAMA)에 실린 대규모 연구는 피임 방법에 따라 VTE 위험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구체적으로 밝혀내며 주목받고 있다.
그렇다면 어떤 피임법이 비교적 안전하며, 어떤 제형이 더 많은 주의가 필요한 걸까? 이번 글에서는 최신 연구 데이터를 바탕으로 피임약의 위험성과 대안적 피임법의 안전성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본다.
경구 피임약은 여성의 배란을 억제하거나 자궁내막을 변화시켜 정자를 차단하는 역할을 하는 호르몬 기반 약제다. 복합제(에스트로겐+프로게스틴)나 단일 프로게스틴 제제 형태로 제공되며, 알약 하나로 간편하게 피임이 가능하다는 장점 덕분에 많은 여성이 사용 중이다.
그러나 최근 연구들에 따르면 이러한 편리함 뒤에는 간과할 수 없는 건강상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그 중에서도 정맥 혈전색전증은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합병증으로, 경구 피임약 복용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혈관 내에 혈전이 생기고, 그 혈전이 폐로 이동해 폐색전증을 일으키거나 심한 경우 사망에 이를 수 있다.
덴마크 올보르그 의과대학의 하만 게일란 하산 요니스 교수 연구팀은 이 같은 위험성에 주목해 대규모 역학조사를 실시했다. 연구는 15세에서 49세 사이의 여성 139만여 명을 대상으로 피임 방법과 정맥 혈전색전증 발생률의 상관관계를 분석했다. 연구에는 경구 피임약뿐 아니라 자궁내 피임장치(IUD), 패치, 피하 이식형 임플란트 등 다양한 피임법이 포함되었다.
분석 결과, 아무런 피임을 하지 않은 여성의 경우 1만인/년당 정맥 혈전 발생률은 2였다. 반면, 에스트로겐과 프로게스틴을 포함한 복합제를 복용한 여성의 경우 10으로, 무려 5배나 높았다. 프로게스틴 단독 제제는 3.6, 자궁내 장치는 2.1, 임플란트는 3.4로 나타났다. 이 수치는 피임법에 따라 위험도가 크게 달라진다는 점을 명확히 보여준다.
특히 눈에 띄는 부분은 복합제의 종류에 따른 차이다. 2세대 제형보다 3세대 프로게스틴을 포함한 복합제에서 혈전 발생 위험이 급격히 증가한 것으로 분석되었는데, 해당 제형의 위험도는 1만인/년 당 14.2로 나타났다. 이는 매우 높은 수치로, 특히 혈전증에 취약한 유전적 소인을 가진 사람이라면 더욱 주의해야 할 대목이다.
반면, 레보노르게스트렐이 포함된 에스트로겐 복합제는 상대적으로 낮은 위험도를 보였다(3.0 수준). 같은 피임약이라도 그 성분과 제형에 따라 혈전증 유발 가능성이 다르기 때문에, ‘피임약=안전하다’는 일괄적 판단은 위험할 수 있다.
이번 연구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자궁내 피임장치와 임플란트의 안전성이다. 이 두 가지 방법은 경구약처럼 호르몬을 전신에 직접적으로 공급하지 않고, 국소적으로 작용하거나 일정량만을 지속 방출하는 형태다. 이 때문에 전신 부작용이 덜하며, 정맥 혈전색전증 발생 위험 또한 매우 낮게 나타났다.
자궁내 장치의 경우, 아무 피임을 하지 않은 경우와 비교해도 VTE 발생률이 거의 차이 나지 않았으며, 임플란트 역시 그 위험이 비교적 낮은 수치로 조사되었다. 이러한 결과는 경구 피임약이 부담스러운 여성들에게 대체할 수 있는 안전한 선택지로 평가받기에 충분하다.
하만 교수는 “이번 연구 결과는 의료진이 환자에게 피임법을 추천할 때 단순히 편의성만 고려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강조했다. 특히 흡연, 가족력, 과거 병력 등 개인의 건강 상태에 따라 피임약의 위험도는 크게 달라질 수 있다. 따라서 자신에게 맞는 피임법을 찾기 위해서는 반드시 의료진과 충분한 상담을 거친 후 결정해야 한다.
또한, 특정 피임약에 부작용을 경험한 이들이 임의로 약을 중단하거나 다른 제품으로 바꾸기보다는 전문가의 조언을 따라 안전하게 대안을 찾는 것이 바람직하다.
경구 피임약, 특히 에스트로겐과 3세대 프로게스틴을 포함한 복합제는 정맥 혈전색전증 위험을 크게 높일 수 있다. 최근 연구들은 이러한 약제가 단순한 피임 수단을 넘어서 건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요한 요소임을 시사하고 있다.
이에 반해 자궁내 피임장치나 임플란트와 같은 비경구 피임법은 상대적으로 혈전 위험이 낮으며, 더 안전한 선택지가 될 수 있다. 결국 피임은 단순한 선택이 아닌, 개인의 건강 상태와 환경에 맞춘 전략적인 결정이 되어야 한다. 편리함만을 고려한 무분별한 피임약 복용은 피하고, 반드시 전문가와의 상담을 통해 신중하게 결정하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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